100억 원짜리 레이싱카에는 에어컨이 없다
한 사람밖에 타지 못하는 차. 바퀴가 밖으로 나와 있는 이상한 모양 무릎 높이의 낮은 차체에 거의 누워서 운전해야 하는 불편한 차. 그러나 소리만으로 충격을 주는 차’
포뮬러 레이싱카를 처음 본 사람의 느낌은 대체로 이렇다. 굉음을 내며 달리는 레이싱카를 직접 보면 누구나 강렬한 인상을 받고 모터스포츠의 팬이 된다. 자동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레이싱카는 그 시대에 가장 멋진 문화 아이콘이다. 경주차는 ‘달리는 컨셉트카’ 이자 도전과 모험 정신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레이싱카의 종류는 여러 가지지만 크게 2가지 타입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먼저 레이싱 전용으로 만든 포뮬러카나 프로토타입(prototype) 경주차 그리고 시판차를 개조한 투어링카나 GT카 등이다.
여기에서는 가장 대표성이 있는 F1 머신에 대해 집중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라이벌 대회인 챔프카나 국내에서도 만날 수 있는 투어링카에 대해서는 별도로 자세히 다루겠다.
포뮬러 원 경주차를 비롯해 경주용 자동차는 ‘머신(Machine)’이라 불린다. 드라이빙 머신, 특히 F1 머신은 이 시대의 과학기술이 낳은 괴물이다. 자동차를 잘 모르는 사람도 몇 가지 제원을 들으면 귀를 의심할만큼 엄청난 성능을 갖고 있다.
우선 배기량 3ℓ 엔진(2005년까지의 의무 배기량)으로 870~900마력의 힘을 낸다. 10당 출력이 300마력에 가깝다는 이야기다. 자동차 성능을 나타내는 기준인 마력(horse power)은 말 한 마리가 끄는 힘을 1’로 보는 출력 측정 단위다. 만약 자동차가 개발되기 전에 F1 머신 정도의 힘을 필요로 했다면 말 900마리를 몰고 와야 했을 것이다. 도로에서 흔히 만나는 3ℓ급 승용차의 출력은 190~200마력 정도. F1 엔진은 같은 크기로 4배나 큰 힘을 낸다.
F1은 2005년까지는 10기통 엔진을 쓰고 있으니 기통당 캔음료 하나보다 작은 300cc 정도의 용량인 셈이다. 캔 10개 정도의 용적에서 비롯된 폭발력이 말 900마리의 힘을 낸다고 생각해보라. 기적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출력이 높은 만큼 속도 또한 빠르다. F1 머신은 실제 경기장에서 최고시속 355km를 낸다. 코너 없이 직선코스만 달린다면 이론상으로는 시속 500km도 거뜬히 돌파할 수 있다.
순발력은 더욱 기가 막힌다. 제자리에 멈춰 선 상태에서 스톱워치를 누른 뒤 출발해 시속 160km까지 가속하고 다시 완전히 멈춰 서는 데는 단지 5,6초 정도면 충분하다.
1분당 엔진 회전속도(rpm)도 1만9,000rpm에 이른다. 보통 승용차는 무리를 해도 7,000rpm을 넘기기 힘들다. 엄청난 엔진 회전 속도는 엄청난 소리를 동반한다. ‘자동차 경주의 매력은 소리에 있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초고속 회전 엔진이 뿜어내는 소음은 관람객의 귀를 괴롭히기도 하지만 자동차 경주만의 매력이기도 하다. ‘쐐액’ 하며 내뿜는 F1과 챔프카의 소리는 소프라노에 비견된다. 세계 정상급 레이스는 소리가 아름다운 경기’인 셈이다.
자동 변속기가 금지된 F1에서는 전자식 반자동 변속기가 쓰인다. 드라이버들은 클러치를 밟지 않고 핸들 뒤에 달린 레버를 당겨 기어를 바꾼다.
아무리 능숙한 드라이버라도 수동 변속기를 쓰면 기어를 바꾸는 데 0.1초는 걸린다. F1 머신의 변속 시간은 단 0.02초, 설명할 필요도 없는기술의 차이다.
일반적인 자동차 제조 기술로는 이 같은 성능을 얻을 수 없다. 부품 하나하나를 손으로 만들다시피 하는 F1 엔진에는 특수한 재료가 많이 쓰인다. 피스톤과 실린더는 알루미늄 합금, 캠샤프트는 마그네슘 합금, 밸브는 티타늄으로 만든다. 무게를 줄이면서 강도를 높이기 위한 재료들이다.
경기에서 이기려면 빠르기만 해서도 안 된다. 넘치는 파워를 컨트롤할 수 있는 제동 성능도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한다. 일반 승용차 브레이크는 현재 속도와 같은 숫자의 제동거리가 필요하다. 즉, 시속 100km로 달리고 있다면 100m의 제동거리를 확보해야 안전하게 정지할 수 있다. F1 머신은 시속 340km에서 시속 80km까지 속도를 줄이는 데 필요한 거리가 고작 100m다.
무게도 중요하다. 같은 배기량의 엔진이라면 되도록 차체가 가벼운 편이 효율적이다. F1 머신의 최저 무게는 605kg. 드라이버가 헬멧 등의 장비를 착용하고 방송용 카메라까지 달았을 때의 무게다. 이보다 가벼우면 규정 위반이 된다.
실제 차체만의 무게는 410kg 정도로 추정된다. 승용차가 보통 1,300~1,500kg이니 얼마나 가벼운 몸집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세부적인 부품의 무게를 알면 더욱 기가 막힌다. 가장 무거운 부품인 엔진의 무게는 고작 90kg. 어른 둘이 번쩍 들어올릴 수 있을 정도다. 실제로 2005년 2월 F1 르노팀이 신형 머신을 발표했을 때 드라이버인 페르난도 알론소(Fernando Alonso)와 지안카를로 피지켈라(Giancarlo Fisichella)가맨손으로 르노의 경주용 엔진을 들고 카메라 기자들 앞에서 포즈를 취하기도 했다.
차의 뼈대라 할 수 있는 섀시의 무게도 고작 30kg이다. 가볍고 단단한 탄소섬유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밖에 타이어는 휠을 끼워서 15kg, 브레이크 디스크는 1kg이다.
지금까지 주로 파워트레인에 관련된 설명을 했지만, 실제로 F1 머신의 성능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주는 것은 차체 디자인이다. 모든 종류의 자동차는 공기의 저항을 받게 된다. 특히 시속 300km 이상을 달리는 고속 레이싱카에는 맞바람이 최대의 적이다. 이 때문에 공기역학적인 설계, 즉 에어로다이나믹스(aerodynamics)가 중요하다. F1 머신의 모든 부품은 공기역학을 고려해 설계된다. 특히 앞뒤에 달려 있는 윙(wing)과 엔드플레이트(Endplate), 옆구리의 바지보드(Bargeboard), 꽁무니 아래의 디퓨저(Diffuser) 등이 눈에 띠는 에어로다이나믹스 부품들이다.
윙의 원리는 비행기와 마찬가지다. 항공기가 육중한 몸뚱이를 하늘로 띄울 수 있는 것은 날개와 공기가 부딪치며 생기는 양력 때문이다. 포뮬러 머신의 윙은 정반대의 작용을 한다. 앞뒤 날개(wing) 등 에어로 다이나믹스 부품을 이용해 머신을 밑으로 내리누르는 힘, 다운포스(Downforce)’를 얻는 것이다.
부력과 반대되는 다운포스는 무게 2,500kg의 힘으로 머신을 짓누른다. 초고속으로 달리면서 절대 뒤집어지는 일이 없도록 차체를 안정시키는 힘, 타이어의 접지력이 유지되도록 하는 힘 등이 모두 여기에서 나온다. 이론상으로는 경주차가 터널 천장에 붙어 달리는 것도 가능하다. 다운포스가 차 무게보다 크기 때문이다.
다운포스를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차의 성능은 완전히 달라진다. 그래서 미하엘 슈마허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은 매클래런팀의 차체 디자이너인 애드리안 뉴이(Adrian Newey)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엔진의 힘을 키우는 것보다 훨씬 빠르고 안정적으로 머신의 성능을 끌어올릴 방법이 바로 에어로다이나믹스 디자인에 있다.
이처럼 놀라운 그랑프리 경주차의 성능에는 그만한 대가가 뒤따른다. 바로 돈이다. 대량생산이 되지 않는 레이싱 전용 머신을 조립하려면 볼트 하나까지 따로 만들 수밖에 없고, 결국 비싼 값이 매겨지게 마련이다. F1 머신은 팔려고 전시장에 내놓는 차가 아니기 때문에 가격을 따로 산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부 발표된 레이싱팀 예산 가운데 마케팅 비용 등을 빼고, 엔진을 공급하는 자동차 회사에 대한 지원비 등을 추정해서 대략적인 값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오늘날 상위권 F1 팀의 경주차 가격을 뽑아보면 대략 90~100억 원 정도가 된다. 물론 차 한 대당 예상 가격이다. 이는 개발과 제작에 참여한 “니어나 직원들의 인건비를 감안한 가격이다. 우리가 지불하는 승값에 제조사 직원의 월급이 포함되어 있듯이 말이다.
날개 하나에 1,000만 원, 타이어 한 짝에 100만 원 등 각 부품 값도 만만찮게 든다. 더구나 이처럼 비싼 차를 만들어놓고도 한 경기가 끝나면 거의 대부분 부품을 새로 바꾸어야 하니 실제 경기 참가 비용은 상상을 초월한다. 2005년부터는 2경기당 1개의 엔진을 쓰도록 하는 규정이 나와 비용 부담이 줄어드는가 싶었지만, 결국 내구성이 강하면서도 출력이 높은 엔진을 만들기 위한 개발에 이전보다 더 많은 돈이 들어갔다고 한다.
이 같은 사실을 알고 나면 사고로 경주차가 부서지는 장면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100억 원이 한순간에 날아가는 장면이 아닌가.
이 비싼 차에 장식적인 요소나 운전의 편의성은 거의 고려되지 않는다. 당연히 에어컨이나 카오디오 따위는 달려 있지 않다.
최고 속도는 무의미하다!
레이싱 드라이버들은 일반인이 경험하지 못하는 속도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시속 300km를 넘는 스피드에서는 전방의 사물이 굴절 렌즈를 통해 본 것처럼 휘어지고, 시야 폭도 작은 공만 한 크기로 좁아진다.
하지만 팀이나 드라이버는 순간 최고 속도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모든 코스가 직선으로만 되어 있다면 당연히 속도가 중요하겠지만, 실제 다양한 각도의 코너를 10여 개 이상 통과해야 하는 그랑프리 경기장에서는 수치상의 단순한 속도가 아니라 ‘속도의 질’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직선에서 아무리 빠른 차라도 코너에서 느림보가 된다면 결과적으로 라이벌에 뒤질 수밖에 없다. 순간적인 속도가 아니라 트랙 전체를 장악하는 속도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가령 직선 주파 경기인 드래그 레이스에 나오는 경주차는 순간 속도로 따지면 500km 이상도 낼 수 있다. 비록 0.01초의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말이다. 이 기록을 근거로 드래그 머신이 F1 차보다 성능이 우수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F1 머신은 단기적인 스피드는 떨어질지 몰라도 실제 도로처럼 곳곳에 코너가 도사린 트랙을 평균 시속 240km 속도로 2시간 내내 달릴 수 있다.
또 비슷한 형식 때문에 자주 비교되는 종목이 F1과 챔프카다. 챔프카는 미국식 오벌 트랙(타원형의 주행 주로)에서 경기를 할 때 시속 400km에 가까운 속력을 내기도 한다. F1의 공식 최고 속력이 355km 정도이니 조금 더 빠른 셈이다. 그러나 같은 경기장에서 함께 달릴 때는 F1 머신에 비해 챔프카의 스피드가 10% 이상 줄어든다. F1에서 가장 느린 드라이버가 챔프카에서 가장 빠른 드라이버보다 기록이 좋다고 할 정도다. 물론 드라이버의 실력 때문이라기보다 머신 자체의 성능에 적잖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경주차의 진정한 성능을 알고 싶다면 속도보다는 무게와 마력을 비교하는 편이 훨씬 정확하다고 조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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