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카레이서 K가 데뷔할 무렵의 일이다. K는 드라이버가 되기로 결심한 뒤 가족에게 사실을 고백했다. 순간 그의 어머니는 얼굴색이 하얗게 변해 “너 죽으려고 그러니?”라고 말했다.
자동차 경주라는 말을 들으면 반사적으로 ‘죽음’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모터스포츠 열성팬들은 고속도로를 운전하다가 사망하는 확률보다 서킷에서 사고로 죽을 확률이 더 낮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일반차보다 보강된 각종 안전장치의 우수성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안전한 카레이싱’이 처음부터 거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적잖은 피의 대가를 치른 것도 사실이니까 말이다.
자동차 경주 역사상 가장 끔찍한 사망사고 중 하나는 1994년 이탈리아 북부 이몰라(Imola)에서 열린 포뮬러 원 산마리노 그랑프리(San Marino Granprix)에서 벌어졌다. 당시 최고의 레이싱 스타인 아일톤 세나(Ayrton Senna)가 탄 윌리엄스팀 머신(경주차)이 깊은 각도로 휘어진 탐브렐로(Tamburello) 코너에서 방향을 틀지 못한 채 그대로 벽을 들이받았다. 관중석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레이스 영웅을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은 곧 현실이 되었다.
부러진 스티어링 휠(핸들)이 세나의 머리를 관통했다는 충격적 사망원인은 이후 몇 년 동안 발표되지 않았다. 세나의 죽음은 많은 것을 바꾸었다. 국제자동차연맹(FILA)은 포뮬러 원 경주차의 안전도를 높이려는 노력을 거듭했다. 타이어에는 접지력을 떨어트리기 위한 홈이 4줄 생겼고 엔진도 마음대로 바꾸지 못하게 되었다. 포뮬러 원(F1)의 안전 규정은 현재까지 끈질기게 강화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불세출의 레이서, 세나 이후 F1 그랑프리에서 목숨을 잃은 드라이버는 나오지 않았다.
F1 그랑프리 최초의 사망자는 지난 1952년 운명을 달리한 루이지 파지오리(Luigi Fagioli, 이탈리아)였다. 그는 F1 경주장 가운데 가장 느린 서킷으로 알려진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연습 주행을 하다가 사망했다.
이 밖에도 현재까지 경기나 연습 주행 중 사망한 F1 드라이버는 모두 52명에 달한다. 이 대회가 1950년에 시작되었으니 2005년을 기준으로 보면 매년 0.9명이 서킷에서 산화한 셈이다. 1950년대에는 아직 안전기준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은 상태여서 경주차가 벽이나 구조물에 충돌하면서 드라이버가 사망하는 일이 많았다. 1954년 F1 독일 그랑프리 예선에서 방호벽에 충돌해 사망한 오노프레 마리몬(Onofre Marimon, 아르헨티나)이나 같은 장소에서 1958년에 사망한 피터 콜린스(Peter Collins, 영국) 등이 전형적인 충돌 사고의 희생자였다.
1960~1970년대에는 충돌 사고에 대비해 차체의 충격 흡수 능력이 발달한 대신 사고 뒤 경주차의 화재로 드라이버가 숨지는 사례가 늘었다. 1966년 F1 독일 그랑프리에서 존 테일러(John Taylor, 영국)가, 1978년 네덜란드 그랑프리에서 로저 윌리엄슨(Roger Williamson, 영국)이 화상으로 사망했다. 이들의 죽음 이후 불에 타지 않는 방염복 제조 기술이 빠르게 보급되었다.
현재의 레이싱 드라이버들은 노멕스라는 특수소재로 만든 레이싱 슈트를 입는다. 이 옷은 자동차 정비공의 작업복처럼 윗도리와 아랫도리가 붙어 있다. 노멕스는 700℃ 이상의 불길에서 적어도 12초 동안은 드라이버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섬유다. F1에서는 슈트뿐 아니라 노멕스로 만든 내복을 입기도 한다.
1980~1990년대에는 사망사고가 큰 폭으로 줄었지만 1982년에는 F1 레이서 자크 빌레뇌브(Jacques Villeneuve)의 아버지인 질 빌레뇌브(Gilles Villeneuve, 캐나다)와 1994년 아일톤 세나 등 당시 인기 절정의 레이서가 목숨을 잃어 드라이버의 안전이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다.
끔찍한 사고로부터 드라이버를 보호하기 위한 노력은 서킷의 구조를 바꾸는 데까지 이어졌다. 1960년대 중반까지 안전 조치는 충격 흡수재로 트랙 주변에 짚동을 쌓아놓는 원시적 수준이었다. 짚동은 맹렬한 속도로 코스를 벗어난 경주차를 받아낼 만큼 충분한 완충력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오히려 불이 붙을 위험이 컸다.
1970년대에는 암코(Amco)로 불리는 순철 소재의 펜스가 등장했다. 암코 방호벽은 쇠붙이치고는 충격을 완화시키는 힘이 좋았지만 문제도 있었다. 쇠 그물이 사람을 얽어매 2차 사고를 내는 역효과를 낳았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가드 레일을 보조하는 타이어 배리어(Tire Barrier)가 보편적인 안전 설비로 자리 잡았다. 이는 말 그대로 타이어를 3, 4겹으로 묶어 만든 방호벽이다. 탄력이 뛰어난 고무의 물성을 이용한 타이어 배리어의 등장 이후 수많은 사고로부터 드라이버를 보호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에버랜드 스피드웨이에도 충돌이 자주 일어나는 지역에는 타이어 배리어가 반드시 설치되어 있다.
경기장의 응급 의료체계도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국제자동차연맹 의료위원회를 중심으로 사고 후 드라이버를 구조하는 카레이싱 전문 의료 분야가 등장한 것이다.
현재 포뮬러 원 그랑프리가 열리는 경기장에는 반드시 메디컬 센터가 갖춰져 있다. 행사 당일에는 2대 이상의 구급차는 물론 소방차, 구조 헬리콥터 등이 배치된다. 일반외과의, 정형외과의, 마취의, 화상전문의는 물론 뇌신경전문의까지 대기할 정도다. ‘움직이는 응급실’ 이 경기장에 차려지는 것이다.
드라이버의 죽음은 반드시 피해야 할 비극이지만 때로는 모터스포츠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높이는 동기가 되기도 한다. 2001년 2월 미국에서 열린 나스카 데이토나(NASCAR Daytona)500 경기에서 이 대회 통산 최다승 기록 보유자인 데일 언하트(Dale Eamhardt)가 사망했을 때의 일이다. 언하트는 데이토나에서만 34승을 거둔 미국의 스타지만 우리나라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일부 국내 언론도 이 사실을 큼지막하게 보도했다. 카레이서의 죽음이라는 소재 자체가 자극적이기도 했지만 같은 날 미국 유일의 전국지인 <USA 투데이>가 1면 머릿기사로 언하트의 죽음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해외언론 동향에 민감한 국내 실정에서 세계적인 신문이 톱기사로 처리한 이야깃감을 놓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언하트의 죽음은 자동차 경주 관련 기사에 인색한 국내 언론의 관행을 깨고 상당 지면을 차지했다. 물론 언하트가 사망한 직접 원인이 목부상이었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만든 한스(HANS)라는 목받침장치가 이후 주요 자동차 경주에서 의무 장비로 자리잡았다는 중요한 사실은 거의 다뤄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레이스 도중에 일어나는 사망사고가 남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지난 2000년 열린 제주 랠리에서 아마추어 드라이버 이기철 씨가 다리 난간을 들이받고 추락하는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현대자동차 연구원이었던 고인은 당시 회사의 진급 시험 일정 때문에 경기 참가가 어려웠지만 서울과 제주를 하루에 두 번 오갈 만큼 의욕을 불살랐던 것으로 알려져 더욱 안타까움을 남겼다.
불과 몇 년 뒤 한 지방 도시에서 비공인 아마추어 자동차 경주가 열렸을 때 주최 측이 안전의무 규정을 지키지 않아 관중이 사망하는 참사도 있었다.
‘죽음의 스포츠’ 라는 오명을 아직 벗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2005년 1월에 열린 다카르 랠리에서도 모터사이클 부문 참가자 호세 마누엘 페레스(Jose Manuel Perez, 스페인)와 파브리지오 메오니(Fabrizio Meoni, 이탈리아)가 경기 도중에 숨지면서 ‘지옥의 랠리’로 불리는 이 대회를 헐뜯는 비난 여론이 고개를 들었다. 개최국 프랑스의 한 국회의원은 다카르 랠리 금지 법안을 요구했을 정도다.
그러나 이 같은 ‘죽음의 그림자’가 레이싱 스포츠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드는 마약일지도 모른다. 사고에 대한 불안과 죽음의 공포 속에 핸들을 잡는 것과 컴퓨터 앞에 앉아 ‘카트라이더 게임’ 을 하는 것을 비교할 수는 없을 테니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드라이버 한 명이 서킷에서 피를 흘릴 때마다 그 대가로 우리는 조금 더 기술적으로 안전하고 완벽한 자동차를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앞서 얘기한 카레이서 K는 이후 국내 중견 선수로 자리를 잡았다. 그의 어머니는 요즈음 태도가 크게 달라져 주변 사람들에게 자동차 경주가 생각보다 안전하다고 설득하고 있다.
참조: 천의 얼굴을 가진 모터스포츠
F1 그랑프리의 가장 어이없는 죽음들
• 나는 새와 부딪쳐 사망
1960년 벨기에 그랑프리에 참가한 알렌스테이시(Alan Stacey, 영국)는 날아오는 새와 부딪쳐 사망했다. 헬멧 제조 기술이 현재처럼 발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인지 빠른 속도로 달리는 드라이버의 안면으로 뛰어든 새가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 죽은 뒤 챔피언 결정
1970년 로터스(Lotus)팀의 간판 주자 요헨 린트(Jochen Rindt,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 그랑프리 예선전에서 서스펜션이 부러지며 경주차가 구조물을 들이받아 사망했다. 하지만 안전벨트가 몸을 압박한 것이 직접적인 사인이었다. 비록 죽긴 했어도 린트는 앞선 9차례의 경기에서 5승을 거두며 높은 득점을 쌓아 그해 챔피언이 되었다. 린트의 사망 이전 점수를 뛰어넘는 드라이버가 없어 모터스포츠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후 챔피언’이 탄생한 것이다. 사망 전 그는 부인에게 챔피언이 되면 바로 은퇴하겠다고 약속했었다. 결국 그 약속은 ‘죽음’으로 지켜졌다.
• 목이 잘린 참사
오스트리아 드라이버 헬무스 쾨닉(Helmuth Koinigg)은 1974년 미국 그랑프리에서 서티스(Surtees)팀 경주차를 몰다가 브레이크 파손으로 가드레일을 들이받았다. 이 가드레일이 찢어지며 흉기로 돌변해 그의 목을 잘랐다.
• 달리다 소화기에 머리 맞아 사망
영국 드라이버 톰 프라이스(Tom Pryce)는 1977년 카얄라미(Kyalami)에서 열린 남아프리카 그랑프리에서 반대편에 있던 경주차를 구조하기 위해 트랙을 가로질러 가던 오피셜 요원을 들이받아 사망하게 했다. 그리고 자신도 따라서 세상을 떴다. 오피셜이 들고 있던 소화기에 머리를 맞았기 때문이다.
• 사고 뒤 후송되어 의료 사고로 사망
스웨덴 레이서 로니 피터슨(Ronnie Peterson)은 1978년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 로터스 경주차를 몰다가 사고로 두 다리가 부러졌다. 죽음에 이를 정도의 충격은 아니었지만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다가 의료 사고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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