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서킷은 저마다의 색깔을 가지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시속 290km의 전속력 코너 130R은 레이싱 드라이버가 얼마나 배짱 두둑한 직업인지 알게 해준다(일본 스즈카 서킷의 130R 코너).”
“직선 주로를 달리다 보면 갑자기 터널이 나온다. 잠시의 암흑이 지나면 강한 빛이 돌아오며 순간 사물을 구분하기 힘든 상태가 된다. 시속 280km에서 말이다(모나코 서킷의 터널 구간).”
“단 몇 초 사이에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다시 오른쪽과 왼쪽을 반복해 다섯 번이나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영국 실버스톤 서킷 베케트 코너).”
F1 드라이버들이 일본 스즈카 서킷, 모나코 서킷(circuit de Monaco), 실버스톤 서킷(Silverstone circuit)을 질주해본 후 쏟아놓은 감탄사들이다.
드라이버가 경주차와 한몸이 되어 필사의 도전을 하는 곳 서킷. 자동차 경기장을 일컫는 말인 서킷은 모터스포츠의 우승 방정식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복잡한 변수다. 물론 지정된 경기장이 아닌 일반 공도나오지에서 자동차를 모는 랠리도 있지만, 오늘날 가장 많은 관중을 끌어모으는 경기들은 대부분 서킷을 무대로 한다. 카메라 배치나 TV 중계가 쉽고 관람객이 경주차를 맘껏 지켜볼 수 있기 때문이다(대표적인 랠리 대회인 WRC의 경우 일반 도로나 비포장 임도를 경기장으로 쓰기 때문에 입장권을 사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자리를 잡고 4, 5시간 이상을 기다린 수고에 비해 30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모든 차들이 지나가버린다).
모든 서킷은 저마다의 색깔을 가지고 있다. 앞서 말한 스즈카 130R 코너나 모나코 터널 구간처럼 다른 경기장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그곳만의 독특한 특징은 드라이버에게 새로운 도전의 기회를 안겨준다. 이는 카트라이더 같은 레이싱 게임에서 코스를 고르는 상황과도 비슷하다. 난이도가 높은 코스와 적응이 쉬운 코스가 있는가 하면 자신에게 특별히 잘 맞는 코스도 있다.
게임 속 경기장은 모니터를 벗어나는 법이 없지만 실제의 서킷은 어느 운동 종목 경기장보다 넓은 곳에서 펼쳐진다. 레이싱 트랙의 길이는 보통 2km와 6km 사이다. 르망 24시간 레이스가 열리는 프랑스 사르트(Sarte) 경기장처럼 총 길이가 13km를 넘는 서킷도 있지만, 이것은 아주 드문 예다.
가장 짧은 2km 길이의 서킷이라 해도 웬만한 축구 경기장 몇 개가 들어갈 수 있다. 널찍한 공간은 대규모 관중을 초대할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하다. 미국 인디애나폴리스 모터스피드웨이는 한꺼번에 30만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다. 매년 5월 말 이곳에서 열리는 인디500 레이스에는 세계 모든 단일 스포츠 행사 가운데 가장 많은 관중이 모인다.
서킷에는 관중석이나 트랙 이외에도 레이스에 필요한 여러 시설물들이 세워진다. 공항의 관제탑처럼 경기장 전체 상황을 관리하는 컨트롤 타워(Control Tower), 레이스 도중 경주차를 손보는 정비소인 피트(Pit), 레이싱카나 타이어, 참가팀의 컨테이너와 장비를 보관하는 패덕(Paddock), 트랙 곳곳에 작은 방갈로처럼 설치되어 레이스 흐름을 감독하는 포스트(Post) 등이 바로 그것이다.
국제대회를 치를 정도의 경기장으로 인정을 받으려면 널찍한 피트와 각국에서 몰려든 미디어를 수용할 수 있는 프레스센터도 준비해야 한다. 국제공항에서 한두 시간 이내에 닿을 수 있는 입지조건도 필수다.
F1그랑프리의 경우 15만 원에서 30만 원 하는 일반 티켓을 구입하면 이들 시설 가운데 지정된 관중석 외에는 들어가지 못한다. 반면 1인당 600만 원 정도 지불하는 ‘패덕 클럽’ 티켓을 가진 부자들은 지나가는 드라이버들과 눈을 마주치는 행운을 맛볼 수도 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서킷은 일방통행이다. 반대편 차선이 없기 때문에 마주 오는 차를 만날 일도 없으니 마음껏 달리면 된다. 물론 출발 신호를 보내는 스타트라인 외에는 신호등도 없다.
아스팔트 등의 노면을 포장하는 방법도 일반 도로와 조금 다르다. 통행량이 많은 일반 도로는 포장 두께가 70cm 이상이지만 서킷 트랙은 38~40cm 정도로 얇게 포장된다. 대신 타이어와 마주 닿는 아스팔트층이 고속도로보다 조금 두껍고 노면을 거칠게 하는 유리가루가 많이 들어간다. 되도록 접지력을 높이기 위한 배려다.
유럽식 자동차 경주를 유치하는 경기장은 거의 대부분 시계 방향으로 주행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F1 그랑프리가 치러지는 19개 서킷 가운데 16개가 시계 방향이다(브라질 인터라고스와 터키 경기장 등은 예외다).
서킷의 개성은 부대 시설이 아닌 트랙의 성격에서 결정된다. 직선이 길어 속도를 낼 수 있는 경기장이 있는가 하면 구불구불한 코너가 많은 곳도 있다. 이 같은 코스의 특성에 따라 서킷을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간단히 설명하면 일반 도로처럼 여러 개의 코너가 있는 경기장을 로드 서킷(Road Circuit), 계란처럼 타원형으로 만든 경기장을 오벌 서킷(Oval Circuit)이라 한다.
로드 서킷은 유럽과 한국, 일본 등 대부분의 나라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유형이다. 오벌 서킷은 철저한 미국식이다. 북미 이외의 지역에서는 일본의 모테키 트윈링이나 독일의 라우시츠링(Lausitzring) 등을 제외하면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미국이 유럽과 차별화해 오벌 트랙을 발전시킨 데서 특유의 쇼비즈니스적인 센스를 읽을 수 있다. 자동차 회사의 프루빙 그라운드(Proving Ground; 새 차의 테스트 주행로)처럼 안쪽이 낮고 바깥쪽이 높으면서 기울어진 형태의 오벌 트랙에서는 관중들의 시선이 경주차가 달리는 장면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따라잡을 수 있다. 마치 경륜장처럼 말이다. 또 그다지 성능이 우수하지 않은 차로도 빠른 속도를 보여줄 수 있는 구조이기도 하다. 미국에서는 오벌 트랙의 규모에 따라 길이 4km 이상인 경기장을 슈퍼 스피드웨이(Super Speedway), 상대적으로 길이가 짧은 경기장을 스피드웨이(Speedway)라 부른다.
모터스포츠의 본고장인 유럽은 이처럼 비현실적인 경기장 형식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동차의 성능을 테스트한다는 카레이싱 본연의 취지에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오벌 트랙의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유럽식 레이스를 받아들인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로드 서킷이 기본이 되고 있다. 로드 코스는 실제 도로처럼 커브 구간과 직선 구간이 섞여 있다. 고속도로와 지방국도의 성격이 다른 것처럼 로드 서킷에도 몇 가지 유형이 있다.
먼저 직선이 길어 빠른 속도가 나는 고속 트랙(High Speed Track)이 있다. 이탈리아의 몬자(Monza) 서킷이나 캐나다의 질 빌레뇌브 서킷, 오스트리아의 A1 등이 대표적인 예다. 몬자의 경우 5.8km 길이의 긴 트랙에 코너는 8개밖에 없어 레이싱카가 최고 출력으로 달리는 시간이 길다.
고속 트랙에서 경기가 치러질 때는 엔진 출력이 승패를 결정한다. 상대적으로 추월도 쉽게 할 수 있어 역전의 여지가 많다. 다만 긴 직선이 끝나는 지점에서는 브레이크의 부담이 커져 이를 잘 안배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다운포스 트랙(Downforce Track)은 이와 정반대의 성격이다. 코너가 많고 꺾이는 각도도 급해 노면에 바싹 붙어 코너링을 하도록 경주차를 내리누르는 공기의 힘, 즉 다운포스가 강하게 작용하도록 세팅된 경기장이다. 코너링 속도가 승부를 결정하므로 엔진의 힘보다는 핸들링이 좋은 차가 유리하다. 다운포스 위주의 경기장에서는 추월이 상당히 힘들다. 이 때문에 출발 순서를 결정하는 예선 결과가 매우 중요하다. 영국의 실버스톤이나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헝가로링(Hungaroring) 서킷이 대표적인 다운포스 서킷이다.
고속 트랙과 다운포스 트랙을 적절히 섞어놓은 복합형 스피드 트랙(Medium Speed Track)도 있다. 긴 직선도 있지만 저속 코너도 많아 엔진의 힘과 핸들링 성능이 모두 중요시되는 경기장이다. 말레이시아의 세팡(Sepang), 브라질의 인터라고스(Interlagos), 독일의 누르부르크링(Nurburgring)과 호켄하임(Hockenheimring), 프랑스의 마니 쿠르 (MagnyCours), 스페인의 바르셀로나(Barcelona), 일본의 스즈카 등 많은 경기장이 복합형 트랙으로 만들어졌다.
로드 코스 가운데 가장 독특한 유형은 스트리트 트랙(Street Track)이다. 이름 그대로 일반 도로를 막아 경기장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Melboume), 모나코 등이 대표적인 예다. 한국도 2003년까지 경상남도 창원시 내에 국제 F3 대회 유치를 위해 스트리트 서킷을 만들었지만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스트리트 서킷은 고정시설을 위한 터를 확보할 필요가 없어 건설비가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그러나 레이싱팀 입장에서는 조금 부담스럽다. 경기 직전까지 일반 도로로 사용되기 때문에 서킷에 대한 데이터를 미리 얻을 수 없어서다. 과거의 기록이 큰 도움이 되지만 경주차가 새로 설계되거나 코스가 일부 바뀌거나 하기 때문에 100% 의지할 수는 없다.
또 평소 승용차나 트럭 등이 지나다니는 공도이기 때문에 노면 훼손이 심한 경우가 많아 위험 부담도 크다. 상설 경기장과 달리 노폭이 좁고 안전지대도 거의 없어 작은 사고가 나도 치명적인 부상을 입는다.
노폭이 좁은 만큼 추월이 힘든 것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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